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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페라가모]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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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가모




1898

BONITO 출신의 살바토레 페라가모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1898년 6월 5일 나폴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Bonito라는 도시에서 안토니오와 마리안토니아 페라가모 사이에서 14명의 자녀 중 11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4만평 이상되는 밭일을 일구며 생활해 나가는 노동자였으며, 그의 어린시절은 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이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살바토레의 형제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살바토레 역시 자연히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살바토레는 어릴때부터 구두장인이 되는게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화공들은 사회에서 홀대접을 받았기에 그의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의 곁에서 작업과정을 지켜보는데 쏟게됩니다. 그러다 살바토레의 여동생 쥬세피나가 첫 영성체를 해야 할 무렵, 영세식에 필요한 하얀 신발 한 켤레를 살 돈이 없었던 가족들이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Bonito의 제화공으로부터 구두를 만드는데 필요로 하는 흰색 캔버스와 도구들을 빌려 그날 밤 혼자 비밀리에 첫 신발이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아침에 여동생의 영세식 신발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본 동생과 가족들은 매우 놀라게 됩니다. 그 당시 살바토레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그의 운명은 이미 뛰어난 구두명인으로 가는 첫걸음을 띠고 있었습니다. 

1909

나폴리에서의 가난

살바토레가 11세가 되던 해에 그는 주머니의 몇 푼 안되는 돈을 가지고, 신발 제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경제 호황으로 넉넉하고 화려한 도시인 나폴리로 가게 됩니다. 그 후 그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6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의 마을에서 자신의 신발 가게를 차리게 됩니다. 

미국으로 이주

1915년 3월 24일, 페라가모는 나폴리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스탬팔리아 증기선에 몸을 실게 됩니다. 16세가 된 살바토레는 자신의 고향 Bonito를 떠나 부푼 꿈을 안고 먼저 미국으로 이주한 형제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머리속은 온통 완벽한 신발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그 비밀을 풀기위해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고자 하였습니다. 승선해서 오른 자리는 200리라짜리 3등석으로 객실의 상태는 처참하고 더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아있던 돈 75리라를 더 내서 2등석으로 갈아타고 우여곡절끝에 1915년 4월 7일, 드디어 15일의 여행을 끝으로 엘리스 섬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20달러를 소지하고 있어야만 했고, 이것을 이민국 관리들에게 보여줘야하는 관행이 있었기에 그 돈이 없었던 그는 고민하게 됩니다. 상황을 보니 이민자들이 많아 일일히 관리자들이 신경을 못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살바토레는 가지고 있던 1달러 짜리 지폐를 다른 종이위에 올려 둘둘 말아 고무줄로 묶어 마치 돈뭉치처럼 보이도록해서 그 상황을 현명하게 빠져나갑니다. 그렇게 그는 미국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페라가모는 동쪽 해안에 위치한 최고의 신발 회사 중 하나인 보스턴의 Plant 신발 공장에서 2주간 근무하게 되지만 큰 감명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기계로 만들어진 신발은 이탈리아의 장인이 만드는 수제화와 비교할 때 품질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산타 바르바라

1915년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그의 형들 알폰소, 지롤라모, 세콘디노가 있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르바라로 향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이탈리아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풍경과 화려한 관광지의 이미지,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가 곧 세워질 도시에 매료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 그의 형 알폰소는 미국 영화 제조사의 의상을 다림질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그의 사촌은 영화 <하늘의 다이아몬드> (1915)에 반복적으로 출연하고 있어서 살바토레는 그들에게 자신의 첫 신발을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시리즈에는 유명한 메리의 동생 로티 픽포드가 출연했습니다. 그는 영화 스튜디오에서 생애 처음으로 서부에서 착용하는 카우보이 부츠를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의 다음 도전은 완벽한 부츠를 제작하는 것이라 다짐하게 되고, 그렇게 그는 편안하고 멋진 카우보이 부츠 제작에 성공하며 영화계에서 주문이 쇠도하게 되자, 미국 헐리우드에서 인정받는 탄탄대로의 삶을 진입하게 됩니다. 
살바토레는 미국 영화 제작사 본사가 위차한 Mission Street에서 멀지않은 곳인 Mission Canyon에 매장을 오픈하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그의 형제들은 매장을 1033 State Street로 옮기고 719 California Street에서 살았습니다. 로티와 메리 픽포드, 파올라 네그리, 코스텔리노 자매, 롤리타 리, 돌로레스 델 리오 와 바르바라 라 마르는 그의 충성어린 고객들이 됩니다. 

1923

헐리우드 부츠 매장 운영

1923년 4월, 헐리우드 언론은 존 보헤논이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멋진 사업 중의 하나인 헐리우드 부츠 가게의 라이센스를 살바토레 페라가모한테 판매했다고 보도했습니다.
Las Palmas Boulevard 모퉁이에 위치한 6687 Hollywood Boulevard에 서 있던 2층짜리 건물은 많은 영화 시사회와 극장 공연이 열리는 그라우만의 이집트 극장 건너편에 있어 몫이 아주 좋은 자리였습니다. 1923년 12월 4일, 이집트 극장은 페라가모에게 세실 드밀레 감독의 십계명 (The Ten Commandments)을 보여주며 영화에 쓰일 신발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도록 요청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살바토레의 헐리우드 프로덕션은 스튜디오용 신발, 개인 고객이 주문한 신발, 그라우만 공연용 신발, 이렇게 세 가지 제품을 나누어 제작하게 됩니다. 
그 당시 페라가모는 2222 North Beachwood Drive에 살았습니다. 

1923-1927

영화와 협력

1923년에 세실 드밀레 감독은 페라가모에게 그의 새로운 영화, 십계명 The Ten Commandments (1923)에 쓰일 신발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도록 의뢰했습니다. 페라가모는 클레어 웨스트가 디자인한 의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옷들을 모두 시립 도서관으로 가져가 연구하였습니다. 감독은 그런 그의 열정과 일처리 능력에 감탄하였고, 1926년 페라가모에게 영화 볼가강의 뱃노래 The Volga Boatman의 신발 제작을 재요청하게 됩니다. 1927년 드밀레 감독은 페라가모에게 또 다른 대작, 왕중의 왕 King of Kings (1927) 작품의 신발을 만들도록 의뢰합니다. 이렇게 페라가모와 함께 일한 감독은 드밀레만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 감독의 동부 저 멀리 Way Down East (1920)와 화이트 로즈 The White Rose (1923), 제임스 크루즈와 함께한 뒤덮힌 마차 The Covered Wagon (1923),  라울 워시의 바그다드의 도독 The Thief of Bagdad (1924) 모두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며, 유명 배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그의 가게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고객이었습니다. 헐리우드의 많은 스타들이 살바토레와 비슷한 또래여서 그들에게 있어 페라가모는 친구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친한 동료인 루돌프 발렌티노는 종종 그와 함께 스파게티를 먹으러 들렀고, 존 길버트, 발렌티노, 페어뱅크스 모두는 Arrowhead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며 페라가모와 함께 주말을 보내곤 했습니다.

1925

헐리우드 가게 오픈 

1925년 2월 19일, 오랜 건물 수리 끝에 페라가모는 이전 가게 입구에서 동쪽 방향의 건물이 위치한 6683 Hollywood Boulevard에 새 매장을 오픈하였습니다. 가게 인테리어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고전적인 기둥에 14세기 중세 태피스트리와 같은 천 장식 수공예 소파및 고급 커튼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페라가모가 원하던 가게의 이미지는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의 예술과 문화를 상징하는 우아한 이미지를 담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가게는 단순한 가게이 아닌 정말 따뜻하고 정감가는 분위기의 살롱이었습니다. 오프닝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유명 배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글로리아 스완슨, 몬티 뱅크스 및 루돌프 발렌티노를 포함한 많은 게스트들이 눈이 띱니다. 그의 가게는 너무 유명해서 1928년 킹 비도르의 영화 Show People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 후 1957년 자서전에서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글로리아 스완슨, 릴리안 지쉬, 장 할로우,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스타들로부터 받은 예상치 못한 주문들을 회상하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롤라 토드를 위해 제작한 양말처럼 신을수 있는 표범 모피로 된 신축성있는 부츠와 진정한 패셔니스트로 불리우는 찰리 채플린의 비서가 된 여배우, 앨리스 화이트를 위해 제작한 우아한 투톤 펌프 디자인을 떠올렸습니다. 오늘날 회사 자료실에는 이러한 신발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그가 만든 가장 화려한 신발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동물인 벌새의 깃털로 장식한 인도 공주를 위한 신발입니다. 그녀는 당시 신발 가격으로 500달러를 지불했는데 그건 살바토레에게 있어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1926

미국 시민권 획득

살바토레는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 그 당시 저명한 지도자들의 디자이너로서 추대을 받았으며 1926년 2월 19일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페라가모 회사 설립 및 이탈리아 고국 귀환

1926년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미국 영화 산업을 에워싼 시장에서 자신의 명성을 알렸으나 거기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램은 소수의 상류 고객층을 위해 맞춤 신발을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일한 제품의 질과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산을 확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1926년 2월 투자를 받아 그는 Ferragamo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어 운영하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만든 신발 아이디어를 가지고 헐리우드 매장에서 미국 고객과 유럽 고객들에게 납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페라가모는 1926년 또는 1927년 초에 이탈리아 행으로 미국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1927

피렌체 도착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살바토레는 예전에 구두 제작 수업을 받던 나폴리에 들른 후, 1927년 여름에 예술과 문화의 도시이자 역사적으로 명성이 있는 비즈니스의 중심지인 피렌체에 도착하게 됩니다. 페라가모는 토스카나 수도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료되었고 미국에서 가져온 카메라로 도시 곳곳을 다니며 우피치 갤러리, 룽가르노 거리, 미켈란젤로 광장, 피에졸레의 언덕을 촬영했습니다. 피렌체는 장인성이 뛰어난 관광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그 당시 파시스트 정부의 전국적인 전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페라가모는 지역의 신발 장인들을 만나면서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만들고 발을 측정하는 그의 새로운 기술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젊은 몇몇의 장인만이 그의 기술에 호기심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살바토레는 그의 통솔아래 75명의 견습생을 위한 연습실 공장을 열게 됩니다. 그는 피렌체의 장인 정신의 유산과 미국 공장의 생산 시스템과의 결합이라는 멋진 계획 프로세스를 단행하였습니다. 그의 공장은 Via Mannelli 57 (현재 건물은 거리 번호 109)거리에 있었으며, 그 곳은 미국으로 가는 기차의 첫 번째 여정인 피렌체-로마 철도 노선을 운행하는 깜뽀 디 마르테 기차역 부근에 위치하여 있었습니다. 점차 이탈리아에서 장인들을 지지하는 시도가 보이자 페라가모는 피렌체에 머무르면서 거주 등록을 하게 됩니다. 

1928-1930

첫 광고

페라가모는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실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자수, 따바르넬레 레이스 및 피렌체 모자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짚과 같은 유명한 전통 피렌체 공예품을 그의 신발에 접목하기 시작합니다. 1930년에 폼페이의 Villa dei Misteri에서 유물이 발견된 것을 기리기 위해 그는 짚으로 만든 신발을 제작하고 특정 브랜드 이름을 "페라가모의 폼페이인"으로 등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살바토레의 제작 활동은 당시의 예술 및 문화 운동과 밀접하여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그가 미국 직물과 소니아 들로네와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사용하던 밝고 생생한 색상과 페인팅 된 캔버스를 사용한 기록들이 패치워크에 남아있습니다. 살바토레는 그 무렵 미래파 화가 쥬세페 란즈만과 피렌체의 Borgo degli Albizi에 광고 그래픽 디자인 회사를 하고 있던 루쵸 벤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루쵸 벤나에게 자신의 신발 광고 및 브로셔의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1929

발명 및 장식 특허권

1929년 7월 9일 살바토레는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아치모양의 발을 지지하기 위해 신발에 삽입되는 강철심 장식을 이탈리아에 특허로 등록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수많은 스타일의 신발 특허를 얻었으며 그 분야에 탁월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특한 장인 스타일의 신발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복제품을 막고, 자신의 제품을 어떻게 보호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고민를 하게됩니다. 
그렇게 회사는 나날이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사장은 1929년 1월 24일 피렌체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건 그가 이탈리아 시민권을 선택하고, 그의 가족을 단합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있었습니다.  

1929-1933

월 스트리트 붕괴 및 은행파산

1929년의 주식 시장 붕괴는 미국과 깊게 연관되어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던 페라가모 회사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의 미국 주주들의 압력과 페라가모의 헐리우드 매장의 매매로 살바토레는 전적으로 소유할 이탈리아 기업을 설립하게 됩니다. 30대에 접어 들었을 때 미국과 전 세계의 경제적 불안정이 전략과 조직 체계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생산 모델의 어려움을 악화시키자 그의 젊은 회사 또한 부정적인 영향으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페라가모는 물러서지 않고 갖은 노력을 시도해 보았으나,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결국 1933년 8월 피렌체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게 됩니다. 
그 때 페라가모는 다시 한번 생산 모델을 재설계 하면서 피렌체 중심가에 현지 고객과 공장을 두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점을 깨달게 됩니다. 

1937

웨지 힐 특허권

30대의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창의력이 풍부한 청년이었으며 어려움이 많은 전쟁 중에도 그의 창작 정신의 강한 의지를 꺽지 못하였습니다. 1936년 3월 베니토 무솔리니는 국가에 광범위한 국유화 및 보호 정책을 강요했으며 이는 자급 경제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국제 연맹이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서의 군사적 침략으로 이탈리아에 대해 무역 제재를 가하자 대응책으로 나온 정책이었습니다. 최고의 품질인 강철이 무기 제조에 사용되자, 그를 대체할 수 있었던 강철의 품질은 상대적으로 낮아 더이상 그의 신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살바토레는 뒤꿈치와 발 볼 사이의 공간을 사르디안 코르크 조각으로 매꾸어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웨지 힐의 탄생입니다. 이 스타일은 편안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 가장 인기있는 스타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이 발명품은 1937년 12월 13일 특허 354889로 나타납니다.

ALTOVITI SANGALLETTI 건물에서의 페라가모 첫 매장 오픈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첫 매장은 피렌체의 Tornabuoni 거리에 위치한 Altoviti Sangalletti 건물 안의 한 공간에서 시작됩니다.  
옛 매장의 기록을 담은 사진은 1937년 “보그 (Vogue) USA” 잡지에 패션 기사에 실린 사진입니다. 
마지막은 스케치는 당시 매장 유리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촬영 기자는 당시 매장 규모를 "4미터 이하"로 기재해 4개의 의자와 바닥에 보이는 신발 몇 켤레 정도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페라가모는 파트너쉽 형태의 소규모 비즈니스로 시작하였습니다.

1938

살바토레 페라가모 (주) 설립 후,  건물 PALAZZO SPINI와 PALAGIO매입 진행 시작

1936년에 페라가모는 파산으로 경제 활동이 힘들어지자 여동생을 통해 중세시대 대표 궁전이자 역사적으로 피렌체의 중요한 상징 건물인, Palazzo Spini Feroni에서 방 몇개를 대여해 사업을 재개하게 됩니다. 파산 후 불과 몇 년 만에 사업이 안정세를 타게 되고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건 Salvatore Ferragamo S.p.A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28년 피렌체에 설립된 Palazzo Feroni를 소유한 회사로 부터 건물 주식을 점진적으로 매입 할 수 있게 되고 Palazzo Spini Feroni는 그 후로 살바토레 회사의 본사 건물이 됩니다. 같은 해 페라가모는 피렌체의 Tornabuoni거리와 로마의 Condotti거리, 런던의 Bond Street에 매장을 오픈하였습니다. 
그는 회사 건물의 주식을 구입하기 사작하고 한 달이 되었을 즈음, 자신의 꿈의 집을 찾기 시작합니다. 피에졸레 언덕에 있는 빌라 Palagio는 그의 맘에 쏙 드는 멋진 집이었습니다. 

1939

원자재 전쟁 및 부족 사태 

전쟁 중 사용 가능한 재료가 점차 부족해지자 페라가모의 창의력에 대한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는 대마와 펠트, 생선 가죽을 재료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반짝임과 유연성이 뛰어나 초콜릿 포장지로 쓰이는 셀로판을 신발 재료로 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셀로판과 컬러 실크 실을 꼬아 코바늘로 뜨거나 직물을 짜는 방식을 통해 더욱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효과를 주는 재료를 만드는데 매진하였습니다. 
1939년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밀라노 via Montenapoleone거리 23번가에 매장을 오픈하였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직전에 그의 회사 직원은 400명으로 하루에 200켤레의 신발을 생산했지만 이탈리아가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생산 물량은 점차 급감하게 됩니다. 

1940

완다 밀레티와 결혼 

1940년 11월 9일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나폴리에서 완다 밀레티와 결혼하였습니다. 완다는 의사와 Bonito의 최고 부장 판사집의 자재였습니다. 살바토레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난 그녀는 결혼 당시 겨우 19세로 서로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1942

패션잡지 "DOCUMENTO MODA" 

"Documento Moda"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파시스트 단체인 국립 패션 협회에서 발행했던 패션 및 섬유에 관한 잡지입니다. 1941년과 1943년 사이에 이 잡지에서는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 특히 미국에서 자신의 신발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판매하고 이탈리아의 수공예의 품질을 세계에 알려 명성을 얻은 페라가모의 이야기를 전하며 자급 경제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 대마, 셀로판, 코르크와 같은 재료등을 주요 이슈로 다루었습니다.   

방어에 관한 특허권

페라가모의 모든 특허가 신발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1943년 8월 14일 특허 405472는 항공기 공격 및 방어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43년 8월 18일에 발행된 특허 405527은 부분적으로 잠수했을 때 잠수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는 독립 해상 요새를 건설을 위한 것입니다. 다중 발사 어뢰에 대한 특허 405769는 1943년 9월 7일에 승인되었습니다.

1945

재시작을 위한 도약

유명 패션 잡지“Bellezza”의 1945년 11월호에서 피렌체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Riccardo Magni는 피렌체 폭탄 테러의 유일한 생존자로 페라가모의 웨지 신발를 묘사한 그림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달인 1945년 11월에 페라가모는 "Ferragamo Esercizi & C. S.p.A."라는 유한 회사를 설립하고, 피렌체에 본사를 두어 살바토레 페라가모 회사의 제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회사는 설립 1년만에 수익을 창출해 내고, 1947년 로마, 밀라노, 제노아에 새롭게 매장을 오픈하게 되면서 유럽과 미국 시장에 페라가모 브랜드를 명성을 다시한번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6

아동용 신발 "첫 걸음" 출시

1946년에 살바토레는 무게가 가벼우면서도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는 아동용 신발인 "Primi passi (쁘리미 빠시)" 또는 "첫 걸음"라는 새로운 라인을 출시하였습니다

1978

여성 신발의 유명한 모델 바라 (VARA) 탄생 

3cm힐의 상징적인 페라가모 데콜테 라인의 신발은 1978년에 1978-1979년대 겨울 컬렉션을 위해 출시된 디자인이었습니다. 이 신발의 첫 번째 모델은 Lillaz로 납작한 리본에 페라가모 이름이 새겨진 금속 악세사리 장식이 돋보이는 바라 스타일의 신발이었습니다. Lillaz 모델의 주재료는 송아지가죽 또는 양가죽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밑창 또한 가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발은 힐이 가죽으로 덮여있어 미국 시장의 호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Lillaz 데콜테는 갑피와 같은 가죽으로 덮힌 힐을 가진 제품으로 미국에서 다시 출시되었습니다.
힐이 가죽으로 덮인 오리지널 버전은 유명한 Vara 데콜테가 되었습니다.
이 신발은 모든 연령대에 적합한 신발에 사용 가능하고 편안함과 실용성이 강조된 모델로 긴 시간 한가지 모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페라가모의 성공적인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페라가모 공식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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