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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GUCCI 구찌]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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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GUCCI 

 

 

1. 구찌의 정의 및 기원

구찌(Gucci)는 구찌오 구찌(Guccio Cucci)가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에 설립한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이다. 구찌오 구찌는 1921년 피렌체에 자신의 성을 딴 ‘구찌’라는 가죽제품 전문점을 열어 이후 세 아들과 함께 1940년대 무렵 밀라노, 로마 등 이탈리아 패션 중심지를 비롯해, 1950년대부터 런던, 뉴욕, 파리 등 전세계로 매장을 확대하였다. 현재 핸드백, 여행 가방, 신발, 실크, 시계, 파인 주얼리 등을 선보이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아이웨어는 사필로(Safilo), 향수는 P&G와 라이선스 형식으로 생산·유통하고 있으며 구찌의 제품은 직영 스토어(2013년 9월 기준 461개)와 백화점 및 전문 스토어를 통해서만 판매하고 있다.

2. 구찌의 탄생 및 설립자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와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194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매장 앞에 서 있는 모습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가업으로 밀짚모자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구찌오 구찌는 밀짚모자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판단하고 1897년 당시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로 갔다. 구찌오 구찌는 이 곳에서 벨보이로 일하며 귀족과 상류층의 기호 및 문화를 익혔다. 부유한 호텔 손님들의 최고급 러기지(Luggage)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구찌오 구찌는 1902년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프란지(Franzi)라는 이름의 가죽 제조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21년 구찌오 구찌는 피렌체에 있는 비냐 누오바 거리(Via Vigna Nuova)에 ‘구찌’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열었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Via Del Parione)에 두 번째 매장을 내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구찌는 설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사보이 호텔에서 근무하며 접했던 영국 귀족의 스타일에, 섬세한 가죽 가공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장인 기술을 결합하여 장갑 및 부츠와 같은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한 가죽 제품을 주로 선보였다. 이것이 ‘구찌’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3. 구찌의 역사

1) 작업장, 제품군, 매장의 확장 ~ 뱀부 백(Bamboo Bag)의 탄생(1935~1950)

구찌오 구찌가 생산한 승마 용품은 승마를 스포츠로 즐기는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마차의 활용도는 과거보다 줄어들어 다양한 제품 라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37년 구찌오 구찌는 작업장을 확장하여 핸드백, 트렁크, 장갑, 신발, 벨트 등 생산 제품을 좀 더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구찌의 가죽 제품은 승마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 많았다. 특히, 승마용품인 호스빗(Horsebit, 말 재갈. 말을 부리기 위해 아가리에 가로 물리는 가느다란 막대. 보통 쇠로 만들며 굴레가 달려 있어 여기에 고삐를 맨다)과 등자를 활용하여 가죽용품에 장식하는 것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 되었다.

1940년대 구찌오 구찌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말기의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했다.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고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로 수출 금지령을 내려 금속, 가죽 등의 소재가 부족했던 시기, 아버지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돕고 있었던 첫째 아들 알도 구찌(Aldo Gucci)는 대마, 삼마, 황마, 대나무 등의 대체품을 소재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알도 구찌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산 대마와 삼마를 이용하여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형태로 직조하고 이를 여행 가방에 사용했다. 이로써 탄생한 구찌의 디아만테(Diamante) 캔버스는 구찌의 첫 시그너처(Signature, 상징적인) 프린트가 되었다.

동시에 구찌는 매장 확장에 힘을 쏟았다. 구찌는 1938년 당시 이탈리아 패션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 부호들이 자주 찾는 쇼핑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로마 콘도티 거리(Via Del Condotti)에 새로운 구찌 매장을 열었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물자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수많은 이탈리아의 가죽 업체가 도산했다. 알도 구찌는 일반적인 가죽 대신 돼지피혁(Pigskin, 스웨이드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았다. 유일하게 수입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이처럼 전쟁 후의 위기는 오히려 구찌의 뱀부 백(Bamboo Bag)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찌 러기지(1935)

뱀부 백(1947)

2) 가족 경영의 시작 ~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1951~1981)

구찌오 구찌는 구찌를 직접 경영하는 한편 세 아들 알도 구찌, 바스코 구찌(Vasco Gucci), 로돌프 구찌(Rodolfo Gucci)를 회사의 주주로서 경영에 참여시켰다. 1951년 로돌프 구찌는 밀라노(Milano) 몬테나폴레오네 거리(Via Montenapoleone) 5번지에 구찌 매장을 열었고, 2년 후인 1953년 알도 구찌는 뉴욕 58번가 사보이플라자 호텔(Savoy Plaza Hotel)에 구찌 매장을 열었다. 이로써 구찌는 뉴욕에 진출한 최초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되었다.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첫째 아들인 알도 구찌와 셋째 아들인 로돌프 구찌가 각각 50%씩 경영권을 나눴다. 알도 구찌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발산하며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알도 구찌는 1961년 창립자이자 아버지인 구찌오 구찌의 이름을 딴 GG 로고를 만들고 이를 캔버스 소재로 만들어 가방, 액세서리, 옷에 사용했으며 같은 해 재키 백(Jackie Bag)을 만들었다. 또한 알도 구찌는 1961년 팜비치, 1968년 비버리 힐즈를 비롯하여 1972년 도쿄와 1974년 홍콩에 구찌 매장을 내며 구찌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창립자의 첫째 아들인 알도 구찌(우)와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좌)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창립자의 아들 로돌프 구찌밀라노 구찌 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구찌는 1975년 향수를, 1979년에는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하였고, 일정 비용을 받고 이름을 빌려주는 라이선스 사업도 시작했다. 1977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미국 비버리 힐즈(Beverly Hills)의 구찌 매장에는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등 톱스타들이 찾아와 금과 다이아몬드 체인을 장식한 1만 달러 상당의 백과 여우털로 만든 호사스러운 침구를 구입하여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구찌의 명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1981년 구찌는 피렌체에서 첫 기성복(Ready to Wear) 패션쇼를 열었고 구찌의 상징 중 하나인 플로라(Flora) 프린트로 만든 옷이 대거 선보였다.

1980년대 구찌 로마 스토어 전경

3) 가족 경영의 위기 ~ 전문 경영인 체제로 변화(1982~1993)

1982년, 구찌는 가족 경영진의 결정을 통해 디자인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을 맡아 경영하는 S.P.A로 전환하고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1년 뒤, 로돌프 구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 구찌(Maurizio Gucci)가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에 알도 구찌의 아들인 파울로 구찌(Paolo Gucci)는 크게 반발하며 파울로 구찌라는 이름으로 핸드백, 액세서리, 와인 등을 판매하는 저렴한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는 구찌 이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이탈리아 전통의 가족 경영에 위기를 불러왔고 그 사이 구찌의 재정난도 심화되었다.

마우리초 구찌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89년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Bergdorf Goodman)의 뉴욕 지사장 돈 멜로(Dawn Mello)를 구찌의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다. 돈 멜로는 구찌에 새로운 디자인 팀을 꾸렸다. 훗날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가 된 당시 29세의 디자이너 톰 포드(Tom Ford)도 이때 구찌 디자인 팀에 합류했다. 마우리초 구찌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도메니코 데 솔레(Domenico De Sole)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다. 이로써 구찌에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도메니코 데 솔레는 유통을 직접 통제하는 동시에 그동안 남발했던 구찌 브랜드의 라이선스 사업을 정리하고 프랜차이즈도 환수했다.

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영입 ~ 현재(1994~2014)

바레인에 본사를 둔 투자 회사 인베스트코프(Investcorp)는 1987년부터 구찌의 지분을 인수했다. 1989년 인베스트코프는 구찌 주식의 50%를 매입했고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이 보유한 50%의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회사의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구찌 내부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95년 돈 멜로는 구찌를 떠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의 회장으로 돌아갔고, 도메니코 데 솔레는 CEO(최고 업무 책임자)가 되었다.

1994년 톰 포드는 컬렉션은 물론 선글라스, 향수, 광고, 매장 등 구찌의 모든 외양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톰 포드가 1995년에 선보인 구찌의 젯셋 글래머(Jet-Set Glamour) 테마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로고, 호스빗 등 구찌의 옛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전통과 새로움을 동시에 부각했다. 무엇보다 톰 포드가 매장과 광고 이미지까지 일괄적으로 감독하면서 새로워진 구찌를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구찌의 변화는 성공적이었다. 1998년 유럽 언론협회는 구찌를 ‘올해의 유럽 기업’에 선정했다. 톰 포드 이후 패션계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진두지휘하며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기도 했다. 2000년, 구찌는 구찌 그룹(Gucci Group)으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피노 프랭탕 레두트(Pinault Printemps Redoute)였던 PPR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으며 구찌를 중심으로 한 럭셔리 포트폴리오 구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

2004년 7월, 구찌의 변화를 주도했던 톰 포드와 도메니코 데 솔레가 재계약에 대한 PPR 그룹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찌를 떠났다. 이에 남성복 디자인의 존 레이(John Ray), 여성복 디자인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Alessandra Facchinetti), 액세서리 라인의 프리다 지아니니(Frida Giannini)로 구성된 3인 디자이너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전 펜디(Fendi)의 핸드백 디자이너였고 2002년 구찌 그룹에 합류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맡은 액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 2006년 그녀는 구찌 전체를 단독으로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브랜드를 맡은 후 4년간 구찌의 매출은 46% 신장했고, 구찌는 2007년 시장조사전문회사인 닐슨(Nielsen)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Patrizio di Marco)가 마크 리(Mark Lee, 2005~2009년 구찌 CEO)를 대신하여 CEO로서 구찌에 합류했다. 같은 해, 구찌는 디자인 사무실을 로마의 빨라조 알베리니(Palazzo Alberini)로 옮겼다.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2015 F/W 패션쇼로 데뷔한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Michele)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찌 [GUCCI] (세계 브랜드 백과, 인터브랜드, 인터브랜드, 인터브랜드, 인터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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