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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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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말콤 맥라렌과 함께 1971년, 런던의 작은 옷가게에서 시작한 브랜드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통 복식에 기반한 남녀 의류, 가방, 슈즈, 선글라스, 스카프, 액세서리 등을 제작 · 판매


비비안 웨스트우드 브랜드 로고

십자가가 달린 푸른색 구슬 모양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의 ORB는 전통을 의미하여, 그 주변의 링은 미래를 의미한다. ‘창조적인 디자인은 전통과의 교류에서 비롯된다’는 디자이너의 철학에 따라 ‘전통을 살려 미래로’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92년 대영제국훈장을 받으며 이 마크 사용을 정식으로 허락 받았다.

1.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정의 및 기원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는 1971년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녀의 동업자이자 연인이었던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이 함께 영국 런던(London)의 킹스 로드(King ’s Road)에 연 패션 매장 ‘렛잇락(Let It Rock)’을 모태로 성장한 패션 브랜드다.

처음에는 구제 제품을 D.I.Y.(Do It Yourself)방식으로 리폼(Reform)한 과격한 펑크(Punk) 풍의 티셔츠(T-Shirt)를 제작한 뒤 ‘렛잇락’ 이름의 매장에서 판매하면서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반항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동업자이자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와 같은 록그룹(Rock Group)의 매니저였던 말콤 맥라렌의 도움으로 영국의 테일러링(Tailoring)과 프랑스(France) 로코코(Rococo)의 우아한 복식 양식을 접목한 의상을 선보이며 펑크 패션을 창시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과 함께 매장의 이름을 자주 변경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을 매장 전면에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런던에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간판을 단 매장을 개장했을 때부터였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여성 의류 컬렉션 이 외에도 현재 남성 의류 컬렉션, 가죽 제품, 액세서리(Accessories), 향수 등을 선보이고 있다.

2.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탄생 및 설립자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본명은 비비안 이사벨 스웨어(Vivienne Isabel Swire)로 영국 더비셔(Derbyshire)의 글로솝(Glossop) 지역에서 1941년 4월 8일에 세 명의 아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방직공이고 아버지는 구두 제조인이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부모님은 자주성 있고 밝고 현명한 분들이었다’고 회고한다. 어린 시절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 1947년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이 선보인 뉴 룩(New Look)을 아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10대 시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종종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 중에서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을 따라 만든 것도 있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학창 시절 교복도 몸에 붙는 펜슬 스커트(Pencil Skirt)로 개조해 입었다. 그녀는 전쟁 후 근검 절약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옷을 만들 때 가능한 천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일반적인 서양 복식과 달리 천을 많이 재단하지 않은 채로 옷을 만드는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기법이 많은 에스닉(Ethnic)한 재단 방식을 활용했고 이는 훗날 그녀가 디자이너가 되고 난 후에도 영향을 주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어머니는 “16세때 이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남다르게 옷을 입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요’라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소녀였을 뿐, 17세가 될 때까지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어서 미술책을 보거나 영화 구경을 한 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1957년, 그녀의 가족은 런던(London) 북서쪽에 있는 해로우(Harrow)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글로솝(Glossop)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을 졸업한 17세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에서 유서 깊고 학비도 비싸기로 유명한 해로 아트 스쿨(Harrow School of Art)에 입학해 파운데이션 코스(Foundation Course, 영국대학입학 예비과정)를 들었으나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다.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교사 생활 틈틈이 액세서리를 만들어서 벼룩 시장에 내다 팔며 패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이어나갔다.

1962년, 21세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댄스 홀(Dance Hall) 매니저였던 데렉 웨스트우드(Derek Westwood)와 결혼해 아들인 벤자민 어서 웨스트우드(Benjamin Arthur Westwood)를 낳고 교사 생활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1965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성격 차이로 데렉 웨스트우드와 이혼하고 런던 남부 지역에서 다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같은 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에드워드(Malcolm Edwards)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말콤 맥라렌이라고 불리던 그의 나이는 당시 18세였다. 예술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만남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인생에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훗날 패션, 음악,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등 다방면의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내가 동전의 한 면이라면 그는 다른 면을 내게 보여주곤 했다’고 말하며 “말콤 맥라렌을 만난 후 나에게 여러 문이 생긴 것 같았고, 그 문의 열쇠는 말콤 맥라렌이 가지고 있었다. 내가 처음 런던에 왔을 때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 갔는데 당시 나에게 내셔널 갤러리 곳곳의 분위기는 기독교의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무서운 느낌이었다. 나중에 말콤 맥라렌과 다시 내셔널 갤러리를 찾았을 때에는 오히려 내가 접한 훈육의 틀을 깨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1967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조셉 페르디난드 코레(Joseph Ferdinand Corre)를 낳았다. 하지만 틀에 속박된 사고와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평생 혼인은 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1960년대 중반, 런던 430번지 킹스 로드에는 ‘옥수스(Oxus), ‘그래니 태이크스 어 트립(Granny Takes a Trip)’, ‘헝 온 유(Hung on You)’ 등 몇몇 유명한 옷가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곳에서 판매하는 옷은 주로 에스닉, 히피(Hippie) 풍의 옷들이었다.

하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이런 에스닉과 히피 스타일의 유행이 한 물 갔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반항적인 영국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히피나 펑크 모두 무정부주의적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나, 히피들이 입던 의상은 다양한 색상의 자연주의적인 분위기였고, 이와는 반대로 펑크는 검은색 일색이었으며 의도적으로 위협적인 차림을 한 것과 같이 히피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1969년, 토미 로버트(Tommy Robert)가 운영하는 ‘미스터 프리덤(Mr. Freedom)’이라는 옷가게가 430번지 킹스 로드에 있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 곳의 단골 손님이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미스터 프리덤’에서 구입한 레오파드(Leopard) 무늬의 벨벳(Velvet) 소재 바지를 즐겨 입었고, 또 직접 만든 서큘러 스커트(Circular Skirt) 혹은 펜슬 스커트를 짧은 양말, 스텔레토 힐(Stiletto Heel) 구두와 함께 입고 다녔다. 말콤 맥라렌은 이런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화려한 공작새, 걸어 다니는 신호등’ 같았다고 회고한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의 권유에 따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까지 했다.

이처럼 독특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삶의 스타일은 1971년 그녀만의 개성과 철학이 담긴 옷가게 ‘렛잇락’을 여는 데 자양분을 제공했고 그녀만의 패션 스타일은 훗날 펑크(Punk)의 아이콘(Icon)인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브랜드 세계 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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