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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발렌시아가]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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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 1895~1972)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금시대를 이끈 쿠튀리에다.




스페인 출신으로 1937년부터 파리에서 컬렉션을 개최하였고 까다로운 최상류층 베스트 드레서 고객들에게 우아함과 기품을 갖춘 완벽한 품질의 의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대중 언론을 기피하고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 또한 거절하였기에 발렌시아가의 대중적 명성은 디오르에 한발 물러서 있었지만 동료들로부터는 완벽주의자(지방시 Givenchy), 쿠튀리에들의 스승(디오르 C. Dior), 패션의 미래를 창조하는 혁신가(세실 비튼 Cecil Beaton)로 존경받았다.

샤넬에 따르면 발렌시아가는 구상, 재단, 봉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상 제작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쿠튀리에였고, 스키아파렐리는 자신이 패션에서 이루고자 한 바를 다 이룬 쿠튀르 계의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고객의 요구와 자신의 엄격한 기준을 따라 오직 최고의 의상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고, 그 순수한 작업 과정에서 새로운 재단과 형식의 창조를 통한 패션의 혁신을 이끈 발렌시아가의 세계는 기성복과 패스트 패션이 주도하는 오늘날에도 큰 향수와 경의를 불러일으킨다.



1.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탄생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1895년 1월 스페인 북부 바스크 해안의 어촌 게타리아(Guetaria)에서 태어났다.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발렌시아가는 일찍부터 옷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키울 수 있었고 그의 재능을 발견한 카사 토레 후작 부인(Marquesa de Casa Torres)의 후원으로 12세 무렵 산 세바스찬(San Sebastían)에 위치한 테일러 고메즈 하우스(Casa Gomez)에서 도제 훈련을 받게 되면서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왕실과 부유층의 여름 휴양 도시였던 산 세바스찬에서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상류 계층의 문화와 취향, 엄격한 영국식 테일러링을 배웠고 이는 발렌시아가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1911년 발렌시아가는 파리 루브르 백화점(Les Grands Magasins du Louvre)의 산 세바스찬 지점에서 여성복 테일러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여성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이 되었고 업무와 관련해 파리를 여행하며 파리의 화려한 패션 산업과 오트 쿠튀르 하우스들의 뛰어난 실력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쿠튀리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발렌시아가는 1917년 세바스찬에서 쿠튀리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고 동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1918년 9월 '발렌시아가(C. Balenciaga)'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어 1919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 스튜디오를 열었다. 1920년 매장은 위치를 옮겨 어머니의 이름을 딴 '에이사(Eis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발렌시아가는 왕가를 비롯한 스페인 최상류층 고객들의 선택을 받았고, 1931년 스페인 공화정의 출범에 따른 위기에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신속히 대응하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지점을 확장하였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을 떠나 오트 쿠튀르의 중심지 파리로 향한다.

1937년 7월 발렌시아가는 친구 니콜라스 비즈카론도(Nicolas Bizcarrondo)와 동업자 블라치오 자보로스키 다탕빌(Wladzio Jaworowski d’Attainville)과 함께 파리 조르주 생크(Avenue George V) 거리에 발렌시아가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1937년 8월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이며 파리에서의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에서 쿠튀르 하우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경험이 있었고, 오래전부터 정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해 샤넬, 비오네 등 유명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미학적, 기술적 전통을 철저히 연구하고 습득해 왔으므로 준비된 쿠튀리에로서 파리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68년 폐점하기까지 파리 최고의 쿠튀르 하우스로서 명성을 누렸다.

2. 완벽을 추구한 쿠튀리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최고의 재료, 완벽한 재단과 봉재, 절제되고 기품 있는 우아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발렌시아가는 숙련된 테일러로서 훈련받았고 오랜 기간 파리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견본들을 구입해 연구하며 파리 쿠튀리에들의 재단과 봉재법을 익혀왔으므로 탁월한 쿠튀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발렌시아가는 기술적, 미적으로 완벽한 의상을 제작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발렌시아가는 훌륭한 쿠튀리에라면 설계할 때는 건축가, 형을 만들어낼 때는 조각가, 색을 다룰 때는 화가, 전체적인 하모니를 창조할 때는 음악가가 되어야 하며, 철학자처럼 절제된 품격을 빚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르네상스적 인간형을 꿈꾸는 쿠튀리에였다.

완벽한 형을 만들어 내려는 발렌시아가의 열정은 새로운 구성과 재단의 가능성을 찾는 끊임없는 실험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수많은 소매 형태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는 그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발렌시아가는 착용자의 모든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동시에 미적으로 아름다운 소매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평생 완벽한 소매를 구현하는 데 몰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래글런 소매, 기모노 소매, 퍼프 소매, 배트 윙 소매, 벌룬 소매, 멜론 소매 등 여러 유형의 소매들에 대한 가능성이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그의 엄격한 기준에 비추어 완벽하지 않은 소매는 언제나 다시 검토되었고 때로 고객들은 옷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언제나 엄숙한 침묵 속에서 경건하게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엄격한 피팅으로도 유명했다.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발렌시아가 하우스에서의 한 번의 피팅이 다른 곳에서 하는 세 번의 피팅과 같은 정도라고 자신의 책에 기록하였다.

지방시에 의하면 발렌시아가는 1960년대 후반 에어 프랑스 승무원 유니폼을 의뢰받았을 때, 3,000명이나 되는 승무원들이 일일이 피팅하기를 원했을 정도로 정말 예외적인 완벽주의자였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그가 기술적, 미적 표현의 자유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의상들을 제작할 수 있게 한 기반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발렌시아가 상표의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 했다.

발렌시아가는 미국 뉴저지의 기성복 생산 공장을 둘러본 후기계 생산으로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품질의 옷을 생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을 포기하였고 영원히 오트 쿠튀리에로 남게 된다.


발렌시아가의 유산
1960년대 스트리트 청년 문화의 부상은 점차 유행 창조의 중심지로서 오트 쿠튀르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최고의 쿠튀리에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던 발렌시아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1968년 봄 컬렉션 발표를 끝으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폐점을 선언했다.

파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산 세바스찬의 하우스가 모두 문을 닫았고 주요 고객들은 그의 충직한 동료이자 친구였던 지방시에게 보내졌다. <이브닝 스탠다드>의 기자 샘 화이트는 발렌시아가의 폐점 소식을 전하며 패션은 이제 완전히 달라지리라 전망하였다.

발렌시아가는 은퇴 후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냈고 1971년 샤넬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대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 발렌시아가는 오랜 우정에 대한 보답으로 카사 토레 후작 부인의 손녀 카디츠 공작부인(Duchess of Cadiz)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고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발렌시아가는 1972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발렌시아가 사후 향수 사업을 포함한 하우스의 경영권은 조카로부터 독일 기업으로 넘겨졌고 1986년에는 자크 보가트(Jacques Bogart)가 인수하였다.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또한 런칭 되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1997년 니콜라스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고 구찌 그룹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러한 발렌시아가 브랜드의 힘든 여정과는 별개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디자인 유산은 그의 사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의 회고전을 통해 후대의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발렌시아가의 작품들은 20세기 패션의 혁신 사례로서 세계 주요 패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1년에는 그의 고향 스페인 게타리아(Guetaria)에 발렌시아가 뮤지엄이 개관하였다.




[네이버 세계 브랜드 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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