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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입생로랑]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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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이 1961년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남녀 기성복, 핸드백, 여행용 가방, 소형 가죽 제품, 구두, 주얼리, 선글라스 등을 제작 · 판매함



생 로랑의 정의 및 기원

생 로랑(Saint Laurent)은 1961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패션 브랜드로서, 2012년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생 로랑은 1960년대의 일반적 패션 형태였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1966년에 기성복 전문 브랜드 ‘리브 고시(Rive Gauche)’를 선보이며 우아한 것이 전부였던 당시 패션에 젊은 스트리트 감성을 도입했다. 생 로랑은 여성을 성차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르 스모킹(Le Smoking)’, 예술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인 ‘몬드리안 컬렉션(Mondrian Collection)’ 등을 선보이며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코코 샤넬(Coco Chanel)과 함께 20세기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이브 생 로랑


1936년 8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오랑(Oran)에서 태어났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영화 등에 관심이 많았던 이브 생 로랑은 11세였던 1947년, 루이 주베(Louis Joubet)가 감독한 연극 ‘아내들의 학교’(L’Ecole Des Femmes, 몰리에르(Molière)가 1662년 발표한 희극으로 나이 든 남자가 순종적 아내를 얻기 위해 인위적 교육을 시키지만, 그녀가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좌절한다는 내용)를 보고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 디자이너, 화가)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이 연극 무대와 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브 생 로랑은 17세가 되던 1953년, 그동안 작업한 코트, 드레스, 수트 등의 디자인 스케치를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Competition)에 제출했다. 국제양모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는 크리스찬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쟈크 파트(Jacques Fath) 등 유명 디자이너가 심사하고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권위있는 대회였다. 이브 생 로랑은 이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부모님과 함께 파리에 시상을 하러 갔는데 당시 ‘보그’(Vogue) 프랑스판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Michel De Brunhoff)를 만나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의 재능을 눈여겨본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후 이브 생 로랑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되었다.

1954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의 조언에 따라 디자인과 재단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의상 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Haute Couture)에 입학했지만 정규 디자인 수업에 실망하고 3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1등을 수상했다. 1955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에게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가을, 겨울 컬렉션의 A라인 스커트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아 즉시 이브 생 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보냈다.

크리스찬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다.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과 액세서리 디자인을 도우며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은 35벌에 달할 정도로 이브 생 로랑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7년 10월,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1957년 11월 15일, 이브 생 로랑이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58년 1월 30일,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의 첫 컬렉션으로 트라페즈 라인(Trapéze Line)을 선보였는데 사다리 형태를 띈 원피스와 스커트는 매우 참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인 1958년 8월,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 두 번째 컬렉션을 통해 루즈한(Loose, 느슨한) 실루엣에 길이도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류를 발표했고, 이에 젊은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중년층에서는 이브 생 로랑의 과감한 디자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 해인 1959년,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보수적인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컬렉션을 선보일 것을 권유했고, 이브 생 로랑은 안정적이고 우아하며 길이도 긴 옷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에서의 네 번째 쇼에서 다시 호블 스커트(Hobble Skirt, 밑이 좁아지는 스커트로 걸을 때 ‘절룩거린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짐)라는 대담한 컬렉션을 발표하여 크리스찬 디올의 옷을 입는 보수적인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크리스찬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경고를 했고 이브 생 로랑은 다섯 번째 컬렉션을 통해 점잖은 수트를 선보였지만 여섯 번째 컬렉션인 1960년에 젊은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비트 룩(Beat Look)을 선보여 보수적인 크리스찬 디올 고객을 다시 한번 경악하게 했다. 비트 룩은 검은색의 니트 터틀넥, 가죽 재킷 등 캐주얼한 아이템이 주를 이루어 디올을 입는 고객들의 우아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을 군대에 보냄으로써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고 여기에 마르크 보앙(Marc Bohan)을 새로 임명했다.

군대에 간 이브 생 로랑은 고국인 알제리가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20일이라는 짧은 군 생활을 마감한 뒤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당시 이브 생 로랑의 동성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는 이브 생 로랑을 대신하여 1961년 디올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10만 달러의 보상금과 임시 사무실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미국의 사업가인 맥 로빈슨(J. Mack Robinson)에게 지분의 80%를 넘기는 조건으로 3년간 70만불을 지원 받아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을 딴 오트 쿠튀르 하우스 론칭을 도왔다. 이것이 생 로랑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생 로랑의 역사

1) 론칭 ~ 몬드리안 컬렉션(1961~1965)

이브 생 로랑은 1961년에 브랜드를 론칭하고 1962년 1월, 이브 생 로랑 본사가 있는 폴랭 호텔(Hôtel Forain)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였다.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은 피 코트(Pea Coat)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귀부인을 위한 화려한 맞춤 드레스가 아닌 캐주얼한 옷을 선보인 시도는 파격적이었다.

한편, 생 로랑 브랜드의 경영을 담당했던 피에르 베르제는 1963년, 뷰티 회사인 찰스 오브 더 리츠(Charles of the Ritz, 다음 해 랑방(Lanvin)과 합병하여 이름을 Lanvin–Charles of the Ritz로 변경함)와 계약하여 1964년 이브 생 로랑의 첫 향수 Y를 론칭하며 생 로랑 브랜드의 활동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1965년, 이브 생 로랑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작품을 컬렉션에 도입하여 컬러 블록(Color Blocks) 드레스를 선보였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브 생 로랑의 역량은 몬드리안 드레스를 선보인 것을 계기로 패션계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2) 전성기 ~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회고전 개최(1966~1984)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남성용 턱시도에서 영감을 받은 스모킹 슈트(프랑스어로 르 스모킹(Le Smoking) 영어로는 스모킹 슈트(Smoking Suit) 혹은 턱시도(Tuxedo)라고 칭함)를 선보였는데 이는 여성 정장에 처음으로 팬츠를 도입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이브 생 로랑은 '생 로랑 리브 고시'(Rive Gauche, 센 강 좌안 지역. 좌를 의미하는 ‘Gauche’라는 단어는 흔히 젊은이의 생활양식을 의미함)라는 이름의 기성복 라인을 론칭하고 투르농 거리 21번지(21 Rue De Tournon)에 리브 고시 매장을 열었다. 이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값비싼 디자이너 옷을 대중들도 쉽게 살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파리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는 오트 쿠튀르에서 벗어나자 이브 생 로랑 컬렉션에는 더 다양한 아이디어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1968년 1월에 선보인 이브 생 로랑 컬렉션에는 사파리 재킷(Safari Jacket, 탐험가들이 주로 입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베이지 계열의 옷), 점프슈트(Jumpsuit, 위 아래가 연결된 원피스형 팬츠), 검은색의 실크 시폰 드레스(Silk Chiffon Dress) 등을 선보였는데, 특히 실크 시폰 드레스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가슴이 다 비쳐 보이는 시스루 룩(See Through look)으로서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1970년 이브 생 로랑은 남성복도 생산하기 시작했고 벨벳(Velvet), 말가죽(Pony Skin)으로 만든 재킷(Jackets)이나 프린트가 있는 실크 셔츠(Printed Silk Shirts), 카프탄(Caftans, 터키 사람들이 있는 소매가 길고 헐렁한 상의), 체인 벨트(Chain Belts)는 대부분 이브 생 로랑 본인이 평소 즐겨 입는 옷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10월 이브 생 로랑은 파리 기성복 컬렉션인 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를 통해 1966년 론칭한 리브 고시 라인을 기반으로 첫 리브 고시 컬렉션을 개최했다. 1973년부터는 매년 4회의 컬렉션을 정기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2회는 매년 1월과 7월에 열리는 이브 생 로랑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었고, 2회는 4월과 10월에 열리는 리브 고시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이었다. 1982년 1월 이브 생 로랑은 론칭 2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 리도(Paris Lido)에서 파티를 개최했고, 스모킹 슈트, 사파리 룩 등 이브 생 로랑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컬렉션에서 재현했다.

1982년 12월부터 1984년 9월까지 2년의 기간 동안에는 ‘이브 생 로랑, 25년간의 디자인’(Yves Saint Laurent, 25 Years of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는 피에르 베르제와 전 보그 프랑스판 편집장이었던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가 주관한 것으로 살아있는 디자이너의 회고전이 박물관에서 열리는 것은 이 때가 최초였다.

3) 브랜드 매각 ~ 이브 생 로랑의 죽음(1993~2008)

1990년대 초반, 이브 생 로랑이 새로운 리브 고시 컬렉션을 선보이지 못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그의 건강악화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경기후퇴(Recession)로 인한 매출부진 등의 이유로 1993년 피에르 베르제는 엘프 사노피(Elf Sanofi)에 그룹을 매각했다. 이브 생 로랑 코스메틱 부분은 엘프 사노피가 경영권을 가지고 패션 부분은 피에르 베르제와 이브 생 로랑이 경영권을 갖는 조건이었다.

1999년에는 구찌그룹(Gucci Group)(현 Kering 그룹)이 이브 생 로랑의 지분 일부를 인수했다. 당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톰 포드(Tom Ford)가 이브 생 로랑 레디투웨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직했고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 라인만 맡았다. 2002년 1월 7일 이브 생 로랑은 은퇴를 선언하고,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에서 마지막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열었다. 2002년 구찌 그룹은 이브 생 로랑을 완전히 인수했다.

2008년 6월1일, 이브 생 로랑은 뇌종양으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르와(Christian Lacroix)는 이브 생 로랑이 ‘샤넬의 형식, 디올의 풍부함, 그리고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재치를 겸비했다’고 회고하며 존경을 표시했다. 크리스찬 라크르와,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등 수많은 디자이너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스 사르코지(Nicolas Sarkozy), 영부인이었던 카를라 부르니(Carla Bruni)까지 이브 생 로랑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4)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시대 ~ 현재(2009~2014)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톰 포드에 이어 2005년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Stefano Pilati)가 맡아 2012년까지 브랜드를 이끌었다. 아르마니(Armani) 남성복과 미우 미우(Miu Miu)에서 경력을 쌓은 스테파노 필라티는 특유의 클래식한 감성과 이브 생 로랑을 예우하는 태도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2012년 3월, 전 디올 옴므(Dior Homme)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에디 슬리만(Hedi Slimane)이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었다. 이와 함께 브랜드명이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 파리(Saint Laurent Paris)로 변경되었다. 2012년 8월 ‘보그’ 파리와의 인터뷰에서 에디 슬리만은 ‘생 로랑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생 로랑이 럭셔리 레디투웨어의 정통을 되찾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6년생 로랑 리브 고시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의 정신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현재 에디 슬리만이 재해석하는 생 로랑은 ‘남성적(Au Masculin)’인 것과 ‘테일러링(Le Tailleur)’, 그리고 ‘격식을 차려 입는 것(Dressing up)’의 방향성을 띠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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