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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발망]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브랜드 역사

by 유에스비이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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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망(Balmain)

발망(프랑스어: Balmain 발맹[*])은 프랑스의 고급 의류 브랜드이다. 1946년 피에르 발맹이 설립하였다.




파리 아방가르드 예술운동가 앨리스 B. 토클라스는, 피에르 발맹(피에르 발망, Pierre Balmain, 1914~1982)의 1948년 컬렉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한 바 있다.

“지난 9월, 피에르 발맹이 그의 컬렉션을 선보이던 날, 그것은 아름다운 꾸밈과 여성의 형(形)과 매력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진정한 ‘모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드레스는 더 이상 실용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며, 실크와 울, 레이스, 깃털과 꽃장식 등을 통해 우아함과 섬세함을 표현하는 미의 산물로 거듭났다.“ 라고 적었다.

평론가들은 종종 아방가르드하거나 센세이셔널 하지 않은 것은 진정한 ‘창조’가 아니라고 얘기하곤 하지만 (실제로 쥬느비에브 다리오는 [A Guide to Elegance]에서, ‘발맹의 의상은 너무나 따분하다’고 평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하지는 않아도 장식적 패션이 부활한 것에 대해 즉각적인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앨리스 B. 토클라스 또한 그 중 하나였다.

그녀의 평에는 전쟁을 전후한 지난 시기의 패션이 아름다움과는 거리를 둔 채 얼마나 추하고 실용적인 것만을 추구해왔는지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변화될 모드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다.

1914년 프랑스 사부아(사보이) 지역의 한 마을에서 출생한 발맹은 그의 자서전에서, 어머니와 이모들이 운영하던 작은 부티크에서 각종 옷감과 드레스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을 가장 행복했던 유년의 추억으로 꼽을 만큼 일찍부터 쿠튀리에의 꿈을 간직했었다.

청년이 되어, 우연한 기회에 파리의 베르나르 하우스(House of Bernard)와 씨 하우스(House of Cie.)의 중심축이었던 마담 프리메(Madame Premet)를 알게 되면서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나, 군의관이 되길 바랐던 어머니의 반대로, 패션이 아닌 건축을 공부하겠다는 전제하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동안, 그의 노트는 설계도가 아닌 패션 스케치들로 점점 채워져 갔다. 발맹은 훗날 쿠튀리에로 활동하면서도 드레이핑보다 드로잉 작업을 더 좋아해서, 언제나 정교한 스케치를 시작으로컬렉션을 구상하였고, 그러한 스케치가현실화 되어가는 과정을 즐겼다.

그는 건축학도로 재학 중이던 시절, 수많은 드로잉 가운데 몇 개를 디자이너 로베르 피게(Robert Piguet)에게 보냈는데, 그 중 3개의 디자인이 채택되어 팔리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디자이너 에드워드 몰리뉴(Edward Molyneux)의 보조 디자이너 제안을 받게 되었고, 1934년 몰리뉴의 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본격적인 패션 인생이 시작되었다.

몰리뉴의 인정을 받으며, 5년간 몰리뉴의 부티크에서 일을 했던 발맹은, 1939년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 당시 파리 의상조합협회 회장)의 하우스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를롱의 패션은 몰리뉴에 비해 양성적인 느낌이 강하였으므로, 여성적이며 엘레강스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발맹의 스타일과는 잘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를롱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해 여름,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또다시 군 복무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41년, 군 제대 후 발맹은 를롱으로부터 복귀 요청을 받았고, 다시 돌아와 새로운 동료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몇 년간 발맹과 디오르라는 두 역사적 디자이너는 를롱 컬렉션의 책임자로서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고 서로의 작업에 관여하였으며,'엘레강스'라는 공통의 취향을 공유하며 동료애를 쌓았다.

두 사람은 쿠튀르를 함께오픈하기로 약속하였지만, 디오르가 결정적 순간에 오픈을 망설이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1945년 발맹이 먼저 자신의 하우스를 오픈하면서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달라지게 되었다.

2차대전을 치르는 동안 유럽은 극도로 파괴되고 빈곤해지면서,많은 사람들이 예술적인 생활 양식과새로운 패션을 선도하던 파리가 예전의 명성과 지위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절망하였다.

이 시기 젊은 디자이너들은 파리를 떠나 뉴욕이나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등 그들의 재능을 수용해 줄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갈 것을 종종 권유받았다.

그러나 직물을 비롯한 원자재의 극심한 부족과 공급량 감축, 금욕과 내핍이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열린종전 기념 파리 컬렉션은, 이전 시대의딱딱하고 지루했던 실루엣의 변화를 예고하며, 주요 언론은 물론 미국에서 건너온 바이어들에게까지 창의적이면서도 잠재적인 상업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1945년, 발맹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디자인들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컬렉션을 발표하며 파리 오트 쿠튀르 재건에 동참하였다. 당시 발맹은 수년간 몸담았던를롱의 하우스를 떠나, 모친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파리 프리미에 거리 44번지에 매장을 오픈한 상태였다.

그는 첫 번째 컬렉션에서, 가늘게 조인 허리와 긴 종 모양의 스커트 라인을 선보였다. 컬렉션에 참석했던 앨리스 B. 토클라스는 그것을 ‘New French Style’이라 명명하였는데,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 룩’ 이 전 세계를 휩쓸기 2년 전이었다. 이처럼 발맹은, 뉴 룩보다 먼저 뉴 룩과유사한 실루엣, 즉슬림한 허리를 강조한 상의와 길고풍성한 하의로 구성된 일명, 'NewFrench Style'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발맹과 디오르, 이 두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은 를롱의 하우스에서동고동락했던 사이로, 비슷한 디자인 아이디어로 비슷한 실루엣을 만들어 발표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패션계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결과적으로는 발맹의 'New French Style'보다 디오르의 '뉴 룩'이 크게 유행하였지만, 새로운 엘레강스 스타일의 귀환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발맹의 스타일은 의미를 갖는다.

1950년대는 사치스럽게 낭만적이며 극도로 여성적인 패션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당시의 ‘여성성’과 ‘세련됨’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인공적으로 완벽하게 꾸며진 전통적인 여성성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발맹은 디오르, 발렌시아가 등과 함께 이러한 1950년대의 모더니즘 엘레강스 패션을 리드하였는데, 그것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고급스러운 소재와 단순해 보이지만 완벽한 맞음새로 표현되었으며, 절제된 수공예적 디테일이 더하여져 나타났다.

1950년대 패션 전반에 나타난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으로의 복귀 경향에 따라 발맹의 의상과 소재 또한 보다 고급스러운 경향을 보였다. 1950년대 초, 발맹은 긴 숄(스톨, stole)을 매치한 데이 드레스와 고급스러운 소재의 이브닝드레스로 인기를 얻었고, 재킷 안에 시스 드레스(Sheath dress)를 입는 룩을 유행시켰다.

그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은 정제된 단순함에서 발휘되었는데, 테일러드 슈트뿐 아니라 웅장한 이브닝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슬림하고 엘레강스한 선(line)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특히 발맹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졸리 마담(Jolie Madame)’ 이라는 특정한 제목으로 컬렉션을 발표했다.

슬림한 실루엣의모피 트리밍을 사용한 이브닝드레스로 대표되는 ‘졸리 마담’의 시대는 오늘날 발맹의 패션 스타일을 상징하는 단어로 남아 있다.발맹의 특기이자 대표작이었던 가는 허리를 강조한 이브닝드레스는, 시폰 소재를 주름잡아 사용하거나 레이스, 실크, 벨벳 위에 자수를 놓는 장식적 경향을 보인다.

1950년대 중반의데이 앙상블 스타일은 전체적으로 몸에 꼭 맞으면서 무릎 아래로부터 퍼지는 실루엣 즉 거꾸로 엎어 놓은 샴페인 잔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형태였는데, 이는 디오르의 돔(dome: 반구형) 실루엣에 대한 그의 응대였다.

발맹은 1960년 영화 [여류 백만장자(The Millionairess)] 속 소피아 로렌의 의상을 비롯하여 브리지트 바르도, 비비언 리, 메이 웨스트 등과 함께 수십 편의 영화 의상을 작업하며 토니상의 의상상 후보자로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으며, 1968년,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인 케바야를 응용한 싱가포르 에어라인의 승무원 유니폼을 디자인하는 등 정통 쿠튀르 무대 밖에서도 많은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방 베르(Vent Vert, 1947)를 비롯하여, 1940년대 말 ~1950년대 초 가장 많이 팔린 향수 중 하나이자 그의 컬렉션과 동명인 졸리 마담(1953), 이부아르(Ivoire, 1979) 등을 발표하여 사랑받았다.

발맹은 성공한 쿠튀리에이자 복식과 미술을 강의했던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건축과 쿠튀르를 종종 비교하였으며, 건축가와 쿠튀리에 사이의 교류를 좋아했다.

그는 “어떠한 구조가 돌을 이용해 표현된다면, 또 다른 구조는 모슬린으로 만들어진다.” 라고 하면서, 건축가와 쿠튀리에 모두 동일한 미의 창조자임을 역설하였다. 발맹은 건축의 경우 설계도의 집행이 곧 설계의 완성을 의미하는 반면, 쿠튀리에의 드로잉은 완성이 아닌 시작에 불과함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즉 건축은 특별한 변동 없이 설계도 그대로 건축물이 완성되어가지만, 의상은 드로잉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옷을 만드는 과정이나 인체에 입혀지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거치며 입혀지는 대상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그는 건축과 의상을 비교하면서, 두 분야 모두 적합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때 건축가는 건축물이 들어설 ‘장소’를 고려해야 하고, 쿠튀리에는 의상이 입혀질 사람의 ‘몸’을 고려하여 소재를 선택해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즉 건축이란 움직임이 없이 고정된 것을 만드는 작업이지만, 의상은 움직이는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문구이기도 한 “의상은 움직임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movement)” 이라는 말을 통해 ‘옷’과 ‘몸’과 ‘움직임’의 관계를 이해했던 쿠튀리에였다.

1982년, 50년대의 위대한 디자이너 중 마지막으로 생존하였던 피에르 발맹이 사망하였다. 발맹이 쿠튀리에로서 항상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대를 초월한 모드였고, 고전적인 여성성에 바탕에 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발맹의 오리지널 빈티지 의상들은 지금도 여전히 시크하고 세련된 감성으로 전 세계 사교계와 패션 피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엘레강스한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재단과 구성에 관한 테크닉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완벽한 맞춤새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많은 대중과 로열 패밀리의 의상을 작업하였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오랜 동료였던 에릭 모르텐센(Erik Mortensen)이 하우스를 이어받았고, 이후 1993년부터 2002년까지는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가 책임자가 되어 50년대의 졸리 마담 룩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이은 디자이너들의 부진과 200개가 넘는 무분별한 라이선스 판매로 한동안 발맹의 이미지는 매우 하락하였다.

2005년에 이르러, 하우스 이름을 ‘Balmain’ 으로 짧게 바꾸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프 드카넹(크리스토퍼 데카르닌, Christophe Decarnin)을 영입한 후 2009년 파워 숄더 룩으로 발마니아(Balmania: 발맹 마니아) 열풍을 일으키며 브랜드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네이버 세계 브랜드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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